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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고대, 중세, 근대 역사 알아보기

by 나도갈래 2024. 6. 29.

사이판 역사 박물관

 

사이판은 제주도의 1/16 정도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오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번 게시글을 읽으면 사이판의 역사 흐름에 대해 아실 수 있게 되실 겁니다.

 

고대

사이판에 처음으로 정착한 원주민은 차모로족입니다. 차모로족은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원주민으로,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문화권에 속합니다. 이들은 사이판에 약 4000년 전에 사이판에 정착하여 생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모로 사회는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리더 역할을 했던 모계 씨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코코넛, 바나나, 토란, 쌀 등을 재배하여 식량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바다와의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숙련된 어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차모로족이 오래전부터 거주해 오면서 남긴 한 가지 문화유산은 라테 스톤(Latte Stone)입니다. 차모로족의 라떼 스톤(Latte Stone)은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암석 구조물이며, 두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부는 평평한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돌 판이며, 하부는 이 돌 판을 받치기 위한 기둥 모양의 돌입니다. 라떼 스톤은 주로 거주지나 공공장소의 바닥에 기둥 위에 돌판을 얹어 구조물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상징물로써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이판은 외부 열강들의 침략과 간섭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탐험가 마젤란이 사이판을 발견하고 나서 사이판을 스페인이 수백 년간 점령하게 됩니다.

 

중세

1521년 3월 경, 포르투갈 태생의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이 세계일주 도중 마리아나 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사이판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565년, 사이판과 다른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들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자들은 사이판에 자신들의 식민 정책을 도입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섬에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동안, 사이판은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 사이의 중요한 교역 기지로 발전했습니다. 스페인 식민자들은 사이판의 자연 자원을 활용하여 건설과 농업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사이판의 인구 구조에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이 시기에 차모로족과 스페인 식민자들 간의 문화적 교류가 발생하면서, 사이판은 다문화적이고 다양한 사회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또한, 스페인 식민지 시대는 사이판의 종교적 전환과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가톨릭이 사이판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사이판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특성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넓혀나가며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1898년,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파리 조약을 체결하면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등 주요 식민지를 미국에 양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뒤늦게 식민지 확장에 눈독을 들인 독일은 태평양 지역으로의 진출을 하고자 하였는데, 스페인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협상을 맺어 1899년 2월 12일, 스페인은 사이판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의 나머지 섬들, 카롤라인 제도, 그리고 팔라우를 독일에 매각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이판은 독일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근대

하지만 독일의 사이판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유로 연합국 측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태평양 지역에 여러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들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1914년, 일본은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들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일본 해군은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 카롤라인 제도, 팔라우 등을 신속하게 점령했습니다. 사이판도 이 군사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사이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섬은 교통 및 경제 인프라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동안, 사이판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사이판을 군사적인 통제 아래에 두고, 섬 내의 교육 및 인프라 시설을 개선하며 일본의 사회적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일본은 사이판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에서 경제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사이판의 비옥한 토양과 적절한 기후를 활용하여 사이판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하여 사탕수수 재배를 확대했습니다. 사탕수수는 설탕을 생산하기 위한 중요한 원료였으며, 일본은 이를 통해 자국 내 설탕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본토와 다른 식민지에서 많은 이주 노동자를 사이판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 시기를 맞아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이판으로 이송되어 노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이판에서 일본과 미국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사이판은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 이후 사이판은 현재까지 미국령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